천주교 전주교구 '어은 공소'
어은동 마을은 1888년 공소가 설립된 유서 깊은 천주교 교우촌이다. 교우촌인 만큼 이 마을 사람 모두가 천주교를 믿고 있으며,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둘째 주 금요일 진안성당 신부님께서 오셔서 미사를 봉헌한다. 2021년 6월 말 기준 신자수는 20세대 43명이다. 마을 주민들은 젊은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가 연로하셔서 공소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많은 교우촌들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란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공소란 본당보다 작은 교회로 천주교에서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예배소나 그 구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은 공소(진안군 진안읍 어은동길 23)는 진안 지역의 첫 천주교 본당이다. 이 건물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천주 교민들이 어은동 마을에 신앙촌을 형성하면서 1888년 전주 본당(현 전동성당)에서 관할하던 공소가 되었다. 이후 신도가 늘어나 1900년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몇 차례 공소를 확장하였다. 1909년에는 돌 너와로 지붕을 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아(亞) 자 모양 한옥 건물로 성당을 새로 준공하였다. 내부는 줄기둥이 두 공간과 복도를 나누는 바실리카 양식(초기 기독교 건축의 평면 양식. 교회 중앙의 통로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신도들이 앉는 자리가 배치되어 있다)이다. 당시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유교 관습에 따라 중앙 기둥 사이의 칸막이로 앉는 자리를 구분하고 출입구를 따로 내었다. 서양 성당의 건축 양식을 한옥 건축 양식과 절충한 이 건물은 우리나라 천주교회사 연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진안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유박해(1801년) 이전부터이다. 어은 공소는 1900년 9월 22일 진안, 장수, 무주, 남원 일대까지 관장하는 본당으로 승격된 후 초대 주임 신부로 전라도에서 두 번째로 사제가 된 김양홍 스테파노 신부님께서 부임하셨다. 당시 인계받은 본당 관할 공소는 11곳이었으나 신자들의 편의를 위해 18개 공소로 나누었고, 신자 수는 999명 어은동만 189명이었다. 그 후 1909년 3월 신자들이 인근 산에서 등짐으로 직접 돌을 운반하여 돌 너와 지붕 목조(49평)의 새 성당을 준공하였고, 1911년 성당 앞에 영신 학교를 세워 국어 한문 산수 등을 가르치며 신자들의 계몽에도 앞장섰던 김양홍 신부님은 어은동이 무주 진안 장수 지역에서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개척하셨다. 학교가 신축되던 1911년 어은동 본당 관할 신자수는 2,117명, 어은동 신자만 520명이었다니 얼마나 교세가 당당했는지 짐작케 한다.
그러나 1922년 어은동 본당은 본당 자리를 마령면 연장리 한들 공소로 넘겨주고 다시 공소로 편제되었으나 해방 후인 1947년 11월 다시 본당으로 승격돼 송남호 주임 신부를 맞이하였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1951년 다시 폐쇄되어 한들 본당의 공소로 있다가 본당이 1952년 진안읍으로 옮겨가면서 어은 공소도 진안 본당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어은 공소는 1909년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돌 너와 성당이 등록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축학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끝으로 중말과 어은 공소 중간쯤 모시골(당고개재) 산 능선에는 천호성지로 유해가 이장된 이명서 성인의 묘터가 있다. 어은 공소를 방문 시에는 이명서 성인의 묘터(현재는 가묘로 되어 있음)가 있는 곳도 방문해 보길 추천한다. 왜냐하면 천주교 문화 유적지 초석의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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